'충청정치반세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3.22 홍선기 대전시장편 4 (1)
  2. 2011.03.22 홍선기 전 대전시장 편 ②
  3. 2011.03.22 홍선기 전 대전시장 편 ①
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35

열정바친 두번의 민선시장 … 그의 족적은 역사로 남아있다



   
 
  ▲ 홍선기 전 대전시장은 1998년 열린 제2회 전국지방동시선거서도 당선돼 같은해 민선2기 대전시장으로 취임식을 가졌다. 홍 전시장 왼쪽에는 고(故) 이원범 전 국회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대전시청 제공  
 
홍선기 전 시장은 두 번의 민선 시장 기간 온 열정을 바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간의 흐름마저 잊는 법. 어느새 2002년에 열리는 3번째 선거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66세가 됐다. 20대 꿈 많던 청년 공무원은 머리엔 흰 서리가 내린 노련한 대전시장이 돼 있었다. 선출직이 아니었다면 벌써 퇴직하고 남을 나이였다. 이즈음 홍 전 시장은 스스로에게 "3번째 선거에 도전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대전발전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태워야 할지, 미래를 후배들의 몫으로 남기고 ‘아름다운 은퇴’를 해야 하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결단의 순간은 돌아왔다.


◆‘불출마하겠습니다’ = 2001년 가을 일이다. 대전과 충남, 충북 등 3개 시도지사와 JP가 천안에서 골프를 친 후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홍 전 시장이 JP에게 "내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이젠 할 만큼 했고, 후배들에게 대전을 맡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JP는 크게 화를 냈다. 앞서 열렸던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은 17석(지역구 12석·비례 5석)밖에 확보하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자민련에게는 2002년 지방선거는 존립과 직결된 상황이었다. 당선이 가장 유력한 홍 전 시장이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홍 전 시장은 JP에게 '거취표명'을 한 것이다. 대전으로 돌아온 홍 전 시장은 이때부터 모든 선거 준비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남은 시장 임기를 아름답게 마무리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동안 벌려 놓았던 사업들을 하나씩 챙기며 몇 달을 보냈다.

그런데 선거가 치러지는 2002년 봄 우연히 홍 전 시장을 만난 JP는 "(선거) 준비는 잘 돼 가나. 당신 밖에 대안이 없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지만 JP의 설득에 홍 전 시장은 다시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청구동에서 "한 번 같이 해봅시다"라는 JP의 짧은 말 한 마디에 여당을 버리고 신생 야당에서 첫 지방선거에 출마할 때처럼 말이다.

문제는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 왔지만, 이미 선거를 지원할 조직이 다 떠나 버린 상태였다는 점이다. 불출마를 결심하고 조직 관리를 안 한 탓이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선 '지난 8년 동안 대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시민들이 알아 줄 것'이라는 자신감도 은근히 생긴 것도 사실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상대 후보들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방심이었다.

이미 민심의 큰 흐름을 돌리기에 늦은 시기였다.

홍 전 시장은 당시 선거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떨어지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한 번은 어느 모임에서 '돈 안 쓴다. 선거운동 열심히 안 한다'라며 나에 대한 성토가 벌어지더군. 제일 답답한 것은 선거에 나선 당사자이고, 출마를 했으면 이기려고 나온 것인데 말이야."

결과는 참혹했다. 그 해 6월 13일 있었던 제3회 지방선거에서 홍 전 시장은 한나라당 염홍철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아픔을 겪으니 세상에 대한 것이 달라지더군. 아침저녁으로 현장을 뛰어다닌 보람이 없는 거야. 결실은 있지만 알아주지 않는 거지."

홍 전 시장에게 그 날의 패배는 무엇보다 쓰라린 추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홍 전 시장은 후배들에게 충고한다.

"선거는 촉각도 방심해선 안 된다. 늘 잘 한 것은 금방 잊어버려도, 못한 것은 표로 연결된다. 후배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고….
 

   
▲ 홍선기 전 대전시장이 민선 2기 당시 이재선 의원과 시내버스를 타고 대전시내를 돌아보고 있다.

◆대전을 떠나다 = 홍 전 시장은 선거 패배 직후 대전을 급히 떠났다. 경기도 수지의 한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하고 부인과 단 둘이 옮겼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지역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홍 전 시장이 낙선 직후 대전을 떠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선거 패배의 후유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대전에서 살 수 없어 떠났다'는 근거 없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말들이 돌고 돌아 홍 전 시장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살고 있다.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실제로 여러차례의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홍 전 시장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다. 그러나 난 이미 내게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일도 많이 했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정치인들도 세대교체가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세대는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

대전을 떠난 지 10년. 홍 전 시장은 그동안 '말을 아끼며 살아온 이유'에 대해 '부재기위 불모기정'(不在其位 不謨其政·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말라)이라는 공자의 말로 설명했다.

비록 '현역'에서 은퇴를 했지만, 그의 말 한 마디나 사소한 행동 하나는 여전히 대전·충남에서 영향력을 미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그것을 홍 전 시장은 스스로 경계했던 것이다.

그는 “한 번 흘러간 사람은 역류 할수 없듯 조용히 묻혀 세상 보아야 한다. 은둔이 아니라 퇴직자의 당연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표현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고향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부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배' 홍선기가 후배들에게 지켜줘야 할 도리였고, 그가 배운 '선비 정신'이었다.

홍선기는 대전에서 낳고 자라서 고향 대전·충남에서 평생을 공직에 몸담았다. 대한민국 정치 역사의 부침을 온 몸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 그가 오늘까지 존경받는 이유는 그의 좌우명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처럼 흔들림 없는 소명을 갖고 순리대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대전에 남긴 수많은 족적은 지울 수 없는 역사로 여전히 남아 있다. <끝>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홍선기 전 대전시장 프로필>

▲1936년 10월 3일 대전 출생

▲학력: 가수원초, 한밭중, 대전고, 중앙대 경제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수료, 충남대 명예행정학 박사

▲경력: 충남도 기획담당관, 아산군수, 서산군수, 민정당 충남도지부 사무국장, 민정당 충남도지부 발전위원, 대전시장, 신용관리기금 이사장, 충남도지사, 민자당 국책자문위원, 자민련 총재 특별보좌관, 대전시장(자민련), 세계과학도시연합회장, 한남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대전대·한국교원대 초빙교수

▲녹조훈장, 홍조근정훈장




Posted by 이선우
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27
   
 
  ▲ 제27대 홍선기 충남도지사 취임. 1992년 9월 19일. 충청투데이DB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홍 전 시장은 민정당 충남도당 초대 사무국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정치의 생리를 전혀 모르던 공무원 출신의 신출내기 정치인 홍 전 시장. 첫 시련은 조직 관리였다.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라고 불릴 만큼 ‘돈’으로 정치가 이뤄지던 시대였지만, 홍 전 시장은 이런 생리를 전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에 20여 년 동안 몸에 밴 공무원의 강직함도 여전히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치판’이 홍 전 시장을 가만히 둘리 없었다. 점심 때 즈음되면 소위 정치꾼들이 당사로 몰려들었다. 으례 이들에게 밥 먹이고, 차 사주는 게 사무처장이 할 일. 그러나 홍 전 시장은 모른 척 했다. 오직 당무에만 몰두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나자 밖에서는 ‘공무원이 사무처장으로 와서 밥도 안 사주고, 보리차만 먹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죽했으면 대전에서 주류 도매상을 하던 홍 전 시장의 친척이 달려와 “내가 당 판공비 줄 테니 제발 사람들에게 밥 좀 사주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

정치 초짜 홍선기에게 한 발 한 발이 벼랑을 걷는 분위기였다. ‘여성부위원장 제도’가 처음 생겼을 당시였다. 부위원장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자, 정치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홍 전 시장도 사무처장으로 내려와 지역 정치 바닥에서 낯을 좀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반대로 홍 전 시장은 남모를 고충에 빠졌다. 소위 ‘자격 미달’이지만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할 인물들이 후보 신청을 한 것이다. 그들은 지역에서 힘 좀 쓴다는 인사들의 부인들이었다. 며칠을 고심하던 홍 전 시장은 급기야 묘안을 짜냈다. 인선 ‘원칙’을 만든 것. 우선 고학력자에 50세 미만, 대전 출신 한 명과 충남 출신 한 명 씩만 뽑는다는 원칙이다.

홍 전 시장은 “그랬더니 후보자들이 대폭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라면서도 “그런데 그 때 떨어진 인사들은 나중에 내가 시장을 할 때까지도 두고 두고 협조를 안 하더군”라고 말했다.

   
▲ 제2대 홍선기 대전광역시장 중구청 연두방문. 1992년 1월 19일. 충청투데이DB
◆대전시장이 되다.

‘현실정치’의 거대한 파도는 부표처럼 떠 있던 홍 전 시장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하자, 홍 전 시장의 ‘사무처장’ 자리도 날아가 버렸다. 신분 보장 해주겠다고 했던 중앙당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이미 사표를 쓰고 나온 마당에 다시 공무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졸지에 실업자 처지가 된 것이다.

홍 전 시장은 “정치인의 말이나 약속은 한 귀로 듣고 흘려야 한다는 것을 그 때 배웠다”고 회고했다.

정치인이 선거에 패배하면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된다. 홍 전 시장도 어디에 가서 하소연조차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무장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조정관(2급)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에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실업자’가 된 판국에 그런 것을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 다시 공직에 복귀한 홍 전 시장은 1년 후 정무실장(1급)으로 승진해 5년을 보낸 후 1990년 12월 6공 정부에 의해 대전직할시장(2대)으로 임명된다. 그에게는 공직생활 30년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그 때 개인적으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공직 최말단에서 여기(대전시장)까지 올라왔고, 더군다나 고향에서 시장을 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다”고 홍 전 시장은 당시를 그렸다.

그렇지만 정권의 입김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이 ‘임명직’ 관선시장의 목숨. 정권의 눈 밖에 나면 하루아침에 옷을 벗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홍 전 시장도 여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시장이 됐지만 ‘정치적 압력’은 늘 그를 힘들게 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사건이 있다. 그가 시장으로 부임하자 발생한 일이다. 업무 파악을 하다보니 대전 보문산 사정리 쪽에서 석산을 개발하도록 허가가 날 판이었다. ‘이권이 개입된 사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은밀히 내용을 파악해 보니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청탁이었다. 그것도 여당의 최고위층의 부탁이라서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임 시장도 개발하도록 허가해 주겠다고 여당 측에 구두로 약속해 놓은 상태였단다. 난감했다. 아무리 여당 최고위층의 청탁이라도 대전 유일의 공원인 보문산을 훼손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 전 시장은 밤잠도 못 잘 정도로 고민에 빠졌다. 비서조차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개발 예정지를 몰래 다녀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홍 전 시장은 조그마한 차트 하나를 직접 만들었다. 그걸 들고 청탁을 부탁한 여당 고위층을 찾아간 홍 전 시장은 청탁 거절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예상대로 돌아온 것은 점잖으면서도 서슬 퍼런 답변이 돌아왔다.

“어떻게 행정이 이럴 수 있나. 전임 시장은 된다고 해놓고 이제와선 안 되느냐고 하니 말이 되나.”

홍 전 시장은 “다른 사업 하나를 만들어 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해 주겠다는 약속으로 간신히 무마를 했지만, 그 당시에는 시장 직을 그만 줄 각오를 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때의 판단에 후회 없단다.


◆가슴아픈 기억

대전시장 자리는 그의 공직생활에서 벅찬 감격의 순간인 동시에 가장 가슴 아픈 기억도 서려 있다.

대전시장 임기 중이었던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1990년 1월 민정당은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고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출범했다)이 참패하면서 시장 직에서 경질됐다. 이때가 1992년 4월이다.

당시 민자당은 대전의 5개 선거구 중 동갑구를 제외한 4개 선거구에서 패배했다. 민자당에서 공천을 잘못한 결과라는 것이 현지의 중론이었으나, 현직 시장이었던 홍 전 시장이 일정 부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여권의 분위기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공천권을 거의 행사했던 사람이 후일 홍 전 시장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될 ‘김종필(JP)’이었다라는 사실이다.

정치와 행정을 오가던 홍 전 시장은 또 다시 ‘실업자’가 됐다. 소일거리 하나 없이 지낸지 한 달여가 채워질 무렵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신용관리기금 이시장으로 가라는 것.

이 대목에서도 숨은 비화가 하나 있다. 홍 전 시장의 기사회생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통일민주당 등과 합당하며 민자당을 만들 당시, 민주계 측에서 넘어온 S 씨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컸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심 파악 차원에서 대전에 내려온 S 씨는 지역의 민주계 인사들과 저녁을 먹게 됐다. 가볍게 지역 돌아가는 얘기나 듣자고 만든 자리는 순식간에 정권 성토의 장으로 변했다. 참석한 인사들은 “대전에 내려와 일 잘 하던 사람(홍 전 시장)을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 지역 민심이 흉흉하다”고 입을 모았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S 씨는 이런 내용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고, 대통령의 지시로 홍 전 시장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위기는 기회를 만든다

홍 전 시장은 어렵사리 신용관리기금 이사장을 맡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공직의 길로 끌어 들었다.

1992년 9월 ‘한준수 연기군수 양심선언 파동’이라는 대형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1991년 말부터 1992년 초 14대 총선을 앞두고 한준수 연기군수는 당시 민자당 임재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주민에게 손목시계를 제공하고, 소속 공무원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하며 금품을 살포하는 등 관권 부정선거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한 군수는 정치권에서의 관권개입 선거운동 사실 등을 언론에 폭로했고, 즉시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과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비위행위 등을 이유로 파면 처분됐다. 하지만 사회적인 파장은 엄청났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깊숙이 개입돼 하수인 역할을 해 왔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공직사회 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심각한 후폭풍을 맞아야 했다.

정부와 여당은 사태 수습이 시급했다. 특히 사건의 핵심 지역인 충남의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를 위해선 충청도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을 찾아야 했다. 청와대 등은 전국을 대상으로 인선에 돌입했고, 신용관리기금 이사장으로 가 있던 홍 전 시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충남도 공무원으로 잔뼈가 굵었고, 정당 생활도 어느 정도 한 홍 전 시장이 적임자로 지목된 것이다. 청와대는 홍 전 시장을 충남도지사로 서둘러 임명했다. 급파 형식이다 보니, 도지사 임명 사령장도 혼자 받았다. 홍 전 시장은 ‘충남도지사’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옮겼지만, 속내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임명을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홍 전 시장은 막중한 임무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도지사에 취임했다. <계속>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Posted by 이선우
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24
   
 
     
 
공직생활 20년쯤 정당의 계속된 구애 “이게 운명이구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를 걸어왔다.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10·26사건과 12·12 쿠데타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역사적 정치 사건이 발생했다.

또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인과 정당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모든 역사는 각종 정치 역사서 등을 통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유독 충청지역의 정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도권과 영·호남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충청인 스스로 충청의 정치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충청 정치 역사’를 정립하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대한민국 정치사의 중요 길목과 고비에서 충청 출신 정치인들의 값진 활약이 있었고,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큰 몫을 해냈다는 것이다.


충청투데이는 2011년 신묘년을 맞아 연중 기획시리즈로 ‘충청 정치 반세기’를 준비하고, 그동안 가려졌던 충청 역사의 도도한 맥의 작은 단편이라도 재조명할 계획이다.
 
첫 시리즈로 충남도에서 공직을 시작해 대전시 관선 시장과 정당 생활, 선거를 통해 뽑힌 민선 시장 등 행정과 정치를 관통하는 역사를 살아온 ‘홍선기 전 대전시장 편’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홍선기 전 대전시장은 1936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그렇듯 홍 전 시장도 일제가 한참 대동하던 암울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10살 나이에 맞은 해방.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홍선기에게는 혼란의 시기가 찾아왔다. 어제까지 본받아야 한다고 배웠던 일본인 선생이 하루아침에 학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해방의 의미도 모른 채 해방을 맞은 지 얼마 안 되면서부터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김일성을 찬양하는 공산당의 전단이 마당 한가득 뿌려져 있었다.

 이것이 1950년 시작될 한국전쟁의 암시였다는 것을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홍선기는 몰랐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전쟁은 현실의 참혹함을 홍선기에게 너무 일찍 가르쳐줬다.


전쟁의 혼란을 홍역처럼 겪은 홍선기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지만, 전쟁이 할퀴고 간 학교에는 변변한 교재도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교실도 없이 노천에서 흑판 걸어 놓고 수업을 해야 했던 홍선기에게 어느 길이 옳은지조차 모를 혼란의 시기였다.

홍 전 시장은 “그 때 느낀 공산주의의 무서움과 악랄함, 고통, 배고픔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이어졌다”라며 “안보가 전제되지 않고는 나라가 부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홍선기의 머릿속에 박힌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믿음과 신념은 그의 인생 마디마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좌우명을 쓰고 있는 모습.


청년 홍선기가 공직에 입문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올 무렵인 1960년이었다. 당시 장면 정부는 ‘4·19 혁명 때문에 정권을 잡았으니 대학생들에게 보상을 하겠다’라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직시험이 처음으로 생겼다. 홍선기는 이를 통해 공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내무부 실무 수습으로 받은 첫 발령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이었다. 1961년 3월이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의 공직생활은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두 달 뒤인 5월에 5·16 군사정변이 터졌고, ‘면서기 홍선기’는 다시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하루아침에 정부 고위직들은 옷을 벗고 나갔지만 다행히 신입 공무원들의 신분은 보장이 됐다. 홍선기는 그 해 6월 희망에 따라 충남 청양으로 발령이 났다.

홍 전 시장은 청양군으로 발령받고 내려갔을 당시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당시 청양군이 요란했어. 그 곳 공무원 중에 대학졸업자로는 내가 처음이라는 거야. 그런데 발령난지 며칠이 지난 후부터 군청에 있는 모든 일이 나한테 떨어지는 거 아닌가.”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비리척결 차원에서 공무원 비리를 파헤치면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쫓겨났고, 당장 군 행정을 할 인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홍선기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고, 승진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후 충남도 기획담당관과 아산군수 등을 거치면서 그의 능력은 더욱 주목받게 된다.

홍 전 시장이 정치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4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26사건과 12·12 쿠데타를 겪고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던 엄혹한 해였다. 5공 정권은 당시 신군부를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 민정당의 조직 강화를 위해 공무원들을 대거 차출하고 있었다.

홍 전 시장 개인에게는 공무원 생활 20년을 조금 넘겼고, 서산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도지사로부터 도 내무국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충남도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을 하던 정석모 의원(1929~2009)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정 의원은 홍 전 시장에게 “논두렁 밭두렁 다녀서 앞으로 비전이 없다. 혹시 민정당에서 부를 수 있으니 알고 있으시오”라고 언질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강창희’라고 소개하는 민정당 조직국장이 홍 전 시장을 찾아왔다.

대전 출신의 강창희는 나중에 5선 의원에 장관,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게 된다.

홍 전 시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서산관광제일호텔에서 강 국장을 만났는데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더군. 이 양반이 ‘나라를 위해 당에서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래서 20년 지방행정에만 몰두한 사람이고, 정당은 전혀 생소한데 언제 정치 배워 나라에 기여하느냐고 했지. 나라 위해서라도 지방에 남아 열심히 하는 것이 국가 위한 것 아니냐고 거부했어. 그랬더니 강 국장이 나한테 ‘당신 나하고 동문인데, 김종필(JP)은 당신 나이에 혁명을 했어’라고 쏘아 붙이더군. 그래서 나도 ‘(당신이나) 정치에서 성공하쇼’라고 말하고 나와 버렸지.”

홍 전 시장과 정치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엔 민정당 고위 간부에게서 호출됐다.

홍 전 시장이 안내된 곳은 의자만 두 개 있는 모처의 한 별실. 이전과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당직자로 보이는 사람이 홍 전 시장에게 “당신, 털면 먼지 안 나와”라며 윽박을 질렀다.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질 무렵,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이 들어와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권 총장은 다짜고짜 “어려운 결심했어. 애국심 하나로 해 보는 거야”라며 홍 전 시장의 당 합류를 못 박았다.

홍 전 시장은 “할 말이 없더군. 이게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서산으로 내려와서 바로 사표내고 당에 들어왔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창희는 자신이 쓴 에세이 ‘열정의 시대’(2009년 중앙북스)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 사무국장들은 주로 정부에서 왔다. 도에서 기획관리실장을 하던 사람, 지역에서 군수를 하던 사람이 맡기도 했다. 당과 정부 간의 협조관계는 대단히 긴밀했다. 지구당 사무국장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중앙당에서 면밀한 심사를 거치고 현지실사를 했다. 국회의원이 추천한다고 누군지도 모른 채 임명하는 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람을 고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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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사진= 우희철 부장 photo291@cctoday.co.kr


Posted by 이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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