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37

시대에 반기든 청년… YS ‘상도동 계보’ 전통야당맨으로 잔뼈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희부 전 의원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국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 프로, 철저한 계보맨, 좌충우돌 정치인, 현장에서 주민과 웃고 울던 동네 아저씨까지….

하지만 그는 4·19의거와 6·3사태를 겪은 학생운동을 했고, 평생을 질곡의 정치판에서 야당만 지키며 잡초처럼 살았다. 그의 정치인생을 되짚어 본다면 그야말로 한국 정치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다. 그의 이력서에는 한국 정치의 역사가 문신처럼 남아 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충남 연기군 전의가 고향인 박희부는 남선전기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사)의 출장소장까지 지낸 아버지 밑에서 무녀 외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까지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그런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동국대 법정대를 다니던 시절 터진 4·19가 계기였다. 1960년 4·19를 맞게 된 청년 박희부는 대학 선배 김동영(1936~1991, 전 국회의원·정무1장관), 최동우(전 내무장관)와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경무대까지 진출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직전 학생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4·19가 난지 한 달도 안 된 5월 2일 이를 피해 자원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65년 복학한 박희부는 학생운동을 계속했다. 시대가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조약인 한일협정은 1951년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JP)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간 비밀 회담을 통해 추진됐다. 14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64년 최종단계를 맞았다. 그해 3월 정부가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학생데모와 야당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965년 6월 국교정상화 교섭을 마무리 짓고, 여당 단독으로 그해 7월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의결됐다.

한일협정이 조인된 65년 당시 대학 4학생이었던 박희부는 총학생 변론부장을 맡아 ‘굴욕적인 한일 협정 국회비준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됐다. 혐의는 국가내란죄.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지만, 정부는 한일협정 통과 후 그를 석방시켰다.

대학졸업을 한 박희부는 이후 ‘4·19, 6·3

범청년 민주수호투쟁위원회’의 일원으로 재야운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196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저지를 위해 4·19세대와 6·3세대가 힘을 합쳐 발족한 조직이었다.

사실 박희부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학생운동 이력에 교도소까지 다녀온 그에게 변변한 일자리를 내줄 곳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영삼(YS)과의 만남

그렇게 자의반타의반으로 재야운동을 이어가던 박희부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김영삼(YS)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가 최초로 ‘40대 기수론’을 앞세우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한 직후인 1970년 1월경이었다.

박희부가 신민당, 그것도 김영삼을 따르는 소위 ‘상도동 계보’에 속하게 된 것은 잠시 선거운동을 도와준 적이 있던 조윤형(1932~1996, 전 국회의원)을 통해서였다.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선언하기 직전 조윤형의 손에 이끌려 당시 정치 1번지인 무교동의 한 선술집에서 처음 그와 만났다.

박희부는 그 자리에서 김영삼에게 곧 있을 자신의 결혼식 축사를 부탁했다.

“졸업하고 나니 취직은 고사하고 제주도 가는 비행기도 마음대로 타지 못합니다. 김 의원께서 제 결혼식 축사를 하면 당신을 따르겠소.”

김영삼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운명이었다. 그는 신민당 입당 직후부터 '김영삼 당수 만들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뛰어들어 세 차례(2년 7개월간)나 감방에서 살았다. 수차례 정보부에 끌려가 설렁탕 국물을 코에 들이붓는 등 말도 못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DJ)이 맞붙은 1970년 9·29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당시 김영삼 캠프에 뛰어들어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참담한 역전패를 당했다.

기다리면 기회는 다시 오는 법. 4년뒤인 1974년 4월 신민당의 유진산(1905~1974·충남 연기 출신·전 국회의원) 당수가 암에 걸려 사망한 뒤 8월에 새로운 당수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린 것이다.

당시 총재경선에는 김영삼, 고흥문 부총재, 이철승 국회부의장, 재력가 정해영 씨, 김의택 총재권한대행 등이 나서 5파전이 됐다. 그 때 박희부는 전남도책을 맡고 뛰었다. 당장 급한 것은 전당대회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 포섭이었다. 그는 지독하리만큼 대의원 포섭에 열을 올렸다. 대의원 한 명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단선인 기차 터널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미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전남의 대의원을 포섭하기 위해 다섯 번을 문전박대 당하고, 그 집의 뒷간에 일부러 뛰어들어 밤새 설득해 마음을 돌린 적도 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김영삼은 전당대회에서 승리했다. 최연소 총재 기록(46세)을 세우며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한 직후 있은 사무처 개편에서 요직인 조직부장에 임명됐다. 대의원 800여명을 직접 관리하던 자리다 보니, 현직 국회의원들조차 박희부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36살 젊은 박희부에게 권력에 대한 단맛은 그리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김영삼’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목과 욕설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박희부는 김영삼의 최측근에서 그를 보호하는 보디가드였고 행동대였다.

야당 정치인 김영삼에게 쏟아지는 오물 세례를 몸으로 막아냈고, 80년대 초 김영삼이 상도동에 연금돼 있을 때는 상도동 집 앞에서 감시하던 형사 몰래 먹을 것을 챙겨 담을 넘어다녔다.

 

   
 

◆첫 출마 “할 말이나 실컷하자”

당시 정치계의 거목으로 떠오른 김영삼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그였지만, ‘금배지’와의 인연은 쉽게 오지 않았다.

박희부가 금배지에 처음 도전한 것은 그의 나이 47살이 되던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12대 총선 때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1984년 5월 18일 YS계와 DJ계의 야당인사들이 연합해 발족한 재야정치 단체)에서 조직국장을 맡고 있던 박희부는 전두환 전 대통령(5공화국)의 신군부 세력이 만든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었지만, 1차 정치해금 대상에 포함되면서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1985년 2·12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당시 금산·대덕·연기 선거구의 신민당(신한민주당) 공천을 받았다.

당시의 선거 제도는 한 선거구 내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공천만 잘 받으면 당선은 무난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박희부는 야당이었다. 그것도 집권세력에 정면을 대항하던 김영삼의 당이었다.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시 민추협은 YS를 따르는 ‘상도동’과 DJ를 따르는 ‘동교동’으로 갈려 있었기 때문에 지구당위원장 머릿수가 무엇보다 중요한 때였다. 박희부의 머릿속에는 지구당을 맡고 선거전에 뛰어들어 김영삼 지지 대의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어차피 당선에 관심이 없으니 선거에서 하고 싶은 얘기나 실컷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이렇게 작심하고 나선 선거이다 보니, 그의 입에선 5공 정부와 집권당인 민정당에 대해 신랄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연단에서 '전두환 군홧발 파쇼정권' '광주항쟁' 등 운동권에서나 쓰던 용어들을 그대로 쏟아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민정당 후보였던 천영성과 민한당 후보였던 유한열 씨가 당선되고 박희부는 3등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고향인 연기군에서는 표가 많이 나온 것 아닌가. 그의 뇌리에는 ‘해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박희부는 그길로 중앙당 당직을 접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빠짐없이 지역에 내려갔다. <계속>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사진= 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박희부는>

△충남 연기군 전의 출생.

△천안중, 경기공고, 동국대 법정대, 동국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조국수호국민협의회(함석헌 회장) 회원 △6·3 동지회 상임위 사단법인 4·19혁명 공로자회 선임 감사(현) △4·19혁명 주역단체 사회방회(고문)△민주화 추진협의회(민추협) 조직국장, 상임운영위 △민주화추진협회 수석부이사장(현) △한국도로공사 이사장 △대한민국 헌정회 운영위원, 이사

Posted by 이선우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