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30

신당(자민련)창당 JP(김종필)와 한배 … 녹색돌풍 일으키며 초대 민선시장 당선

   
 
  ▲ 자민련을 창당한 JP가 6·27 지방선거에 출마한 홍선기 대전시장 후보와 함께 유등천변에서 막바지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충청투데이DB  
 


◆JP와 만나다


정치는 늘 변화한다. 흐르는 물처럼 단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물 속 밑바닥의 작은 돌멩이만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만큼 정치는 예단할 수 없다. 홍 전 시장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홍 전 시장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가 1994년경이다.

당시 정가에선 ‘조만간 지방자치가 실현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실제로 정치권에서 홍 전 시장에게 물밑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소위 지방선거가 치러지면 출전시킬 ‘선수’를 물색하는 작업이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소문이 퍼지고 있었는데, 1년 후 김종필(JP) 민자당 대표가 탈당해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석모 의원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청구동에 들어가자”는 연락이었다. JP의 자택이 서울시 중구 청구동에 위치해 있다 보니 정치인들은 JP의 집을 ‘청구동’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이 홍 전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청구동 방문을 권유했다.

홍 전 시장도 ‘무슨 일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접촉을 시도한 의원 대부분이 JP 직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 전 시장은 망설였다. 청구동을 간다는 것 자체가 암묵적으로 JP와 한 배를 타겠다는 것을 시사 하는 일이다. 정치적 운명이 달린 결정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오래 끌 문제도 아니다.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일 아닌가.

그는 고심 끝에 청구동에 들어가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 날 약속대로 청구동에 간 홍 전 시장은 거실에 대기하며 JP와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심대평(현 국민중심연합 대표) 씨와 K 씨가 거실로 들어오는 것 아닌가. 이들 모두 관선 대전시장과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인물들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드디어 JP가 있는 내실로 안내됐다.

“한 번 같이 해봅시다.”

JP는 이들을 보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했다. JP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대답을 못하고 나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대전지역 신문사의 서울 주재 기자들이 JP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다. 다음 날 이들의 JP 방문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비상이 걸린 건 민자당이었다. 기사가 나온 날 민자당 국회의원이 홍 전 시장에게 급하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던 홍 전 시장은 며칠 후 강남의 한 호텔 일식집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장소에는 민자당 대표가 나와 있었다.

대표는 홍 전 시장에게 “왜 하필 그런 사람이 만든 당을 가려고 하느냐”며 당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어 당에 남아 있으면 공천을 보장해 주고, 떨어지더라도 장관 자리를 주겠다는 구체적인 제안까지 내밀었다.

홍 전 시장은 난처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홍 전 시장은 작심하고 말했다.

“대표님, 젊어서부터 고향에서 민선 시장이나 도지사로 일해 보는 것, 그것도 아니면 면장이라도 하면서 봉사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지역 여론도 이 당(민자당)으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홍 전 시장은 이 말을 뒤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민자당에 탈당서를 제출했다.

탈당을 한 홍 전 시장은 JP의 신당 창당 작업에서도 한 발 물러선 채 집에서 칩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당을 준비하는 조직 내에서 1995년 6월 27일 치러지는 첫 민선 단체장 후보 명단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홍선기는 ‘대전시장 출마’, 심대평은 ‘충남도지사 출마’로 가닥이 잡혔다.

민자당에선 임명직 시장을 지낸 바 있는 염홍철(현 대전시장) 씨가 후보로 나섰다는 소문이 들렸다.

 

   
▲ 자민련 대전시장 후보 추대식이 열린 1995년 5월 15일 홍선기 후보가 JP가 써준 ‘출사무적’ 휘호를 들어보이고 있다. 충청투데이DB


◆자민련 ‘녹색깃발’ 들다

신당 창당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1995년 3월 드디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정식 창당대회를 열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깃발이 올랐다. 홍 전 시장은 당의 요청으로 창당대회에서 창당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신당이 창당된 마당에 홍 전 시장도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대전 서구 가장동에 주공 아파트를 얻어 내려왔다.

그런데 막상 선거에 뛰어들려고 보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모아둔 돈도 없었다.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데, 창당만 했을 뿐 신당의 실체가 없다보니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홍 전 시장은 무조건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그런 중 한 지인으로부터 ‘대전은 대전상고 출신이 많아 무시할 수 없으니 이들의 도움을 받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홍 전 시장은 당장 대전상고 동창회장을 찾아가 ‘일 할 만한 사람 좀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고, 후일 선거에서 이들의 지원을 톡톡히 받게 됐다.



◆자민련, 핫바지 돌풍에 충청도 싹쓸이

이즈음에 충청민심을 자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충청도 핫바지론’이다. 김윤환 당시 민자당 의원이 “충청도 사람이 당을 새로 만든다는데, 충청도 사람들이 핫바지냐”며 탈당한 JP를 비판했다는 내용이 신문 지상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김 의원은 JP를 비난한 것이지만, 충청도 민심은 ‘핫바지’에 꽂혔다.

지방선거를 몇 개월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핫바지’는 엄청난 휘발성을 띠고 번졌다. 이는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자민련의 ‘녹색돌풍’으로 이어졌고, 충청지역을 강타했다.

결국 그해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충청 지역을 싹쓸이 했고, 이듬해 총선까지 이어져 국회 의석 50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다.

홍 전 시장도 63.8%의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의 영광을 안고 초대 민선 대전시장이 됐다.

당시 자민련은 홍 전 시장 이외에도 충남도(심대평 후보), 충북도(주병덕 후보), 강원도(최각규 후보) 등에서도 광역단체장을 배출했다.

이후 홍 전 시장은 “초대시장으로서 고향인 대전이 광역시로 발전할 수 있는 주춧돌을 놓겠다”라는 취임 일성처럼 일에만 몰두했고, 4년 후인 1998년 6월 4일 열린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홍 전 시장은 무려 73.7%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계속>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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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27
   
 
  ▲ 제27대 홍선기 충남도지사 취임. 1992년 9월 19일. 충청투데이DB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홍 전 시장은 민정당 충남도당 초대 사무국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정치의 생리를 전혀 모르던 공무원 출신의 신출내기 정치인 홍 전 시장. 첫 시련은 조직 관리였다.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라고 불릴 만큼 ‘돈’으로 정치가 이뤄지던 시대였지만, 홍 전 시장은 이런 생리를 전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에 20여 년 동안 몸에 밴 공무원의 강직함도 여전히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치판’이 홍 전 시장을 가만히 둘리 없었다. 점심 때 즈음되면 소위 정치꾼들이 당사로 몰려들었다. 으례 이들에게 밥 먹이고, 차 사주는 게 사무처장이 할 일. 그러나 홍 전 시장은 모른 척 했다. 오직 당무에만 몰두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나자 밖에서는 ‘공무원이 사무처장으로 와서 밥도 안 사주고, 보리차만 먹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죽했으면 대전에서 주류 도매상을 하던 홍 전 시장의 친척이 달려와 “내가 당 판공비 줄 테니 제발 사람들에게 밥 좀 사주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

정치 초짜 홍선기에게 한 발 한 발이 벼랑을 걷는 분위기였다. ‘여성부위원장 제도’가 처음 생겼을 당시였다. 부위원장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자, 정치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홍 전 시장도 사무처장으로 내려와 지역 정치 바닥에서 낯을 좀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반대로 홍 전 시장은 남모를 고충에 빠졌다. 소위 ‘자격 미달’이지만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할 인물들이 후보 신청을 한 것이다. 그들은 지역에서 힘 좀 쓴다는 인사들의 부인들이었다. 며칠을 고심하던 홍 전 시장은 급기야 묘안을 짜냈다. 인선 ‘원칙’을 만든 것. 우선 고학력자에 50세 미만, 대전 출신 한 명과 충남 출신 한 명 씩만 뽑는다는 원칙이다.

홍 전 시장은 “그랬더니 후보자들이 대폭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라면서도 “그런데 그 때 떨어진 인사들은 나중에 내가 시장을 할 때까지도 두고 두고 협조를 안 하더군”라고 말했다.

   
▲ 제2대 홍선기 대전광역시장 중구청 연두방문. 1992년 1월 19일. 충청투데이DB
◆대전시장이 되다.

‘현실정치’의 거대한 파도는 부표처럼 떠 있던 홍 전 시장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하자, 홍 전 시장의 ‘사무처장’ 자리도 날아가 버렸다. 신분 보장 해주겠다고 했던 중앙당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이미 사표를 쓰고 나온 마당에 다시 공무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졸지에 실업자 처지가 된 것이다.

홍 전 시장은 “정치인의 말이나 약속은 한 귀로 듣고 흘려야 한다는 것을 그 때 배웠다”고 회고했다.

정치인이 선거에 패배하면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된다. 홍 전 시장도 어디에 가서 하소연조차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무장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조정관(2급)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에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실업자’가 된 판국에 그런 것을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 다시 공직에 복귀한 홍 전 시장은 1년 후 정무실장(1급)으로 승진해 5년을 보낸 후 1990년 12월 6공 정부에 의해 대전직할시장(2대)으로 임명된다. 그에게는 공직생활 30년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그 때 개인적으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공직 최말단에서 여기(대전시장)까지 올라왔고, 더군다나 고향에서 시장을 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다”고 홍 전 시장은 당시를 그렸다.

그렇지만 정권의 입김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이 ‘임명직’ 관선시장의 목숨. 정권의 눈 밖에 나면 하루아침에 옷을 벗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홍 전 시장도 여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시장이 됐지만 ‘정치적 압력’은 늘 그를 힘들게 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사건이 있다. 그가 시장으로 부임하자 발생한 일이다. 업무 파악을 하다보니 대전 보문산 사정리 쪽에서 석산을 개발하도록 허가가 날 판이었다. ‘이권이 개입된 사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은밀히 내용을 파악해 보니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청탁이었다. 그것도 여당의 최고위층의 부탁이라서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임 시장도 개발하도록 허가해 주겠다고 여당 측에 구두로 약속해 놓은 상태였단다. 난감했다. 아무리 여당 최고위층의 청탁이라도 대전 유일의 공원인 보문산을 훼손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 전 시장은 밤잠도 못 잘 정도로 고민에 빠졌다. 비서조차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개발 예정지를 몰래 다녀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홍 전 시장은 조그마한 차트 하나를 직접 만들었다. 그걸 들고 청탁을 부탁한 여당 고위층을 찾아간 홍 전 시장은 청탁 거절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예상대로 돌아온 것은 점잖으면서도 서슬 퍼런 답변이 돌아왔다.

“어떻게 행정이 이럴 수 있나. 전임 시장은 된다고 해놓고 이제와선 안 되느냐고 하니 말이 되나.”

홍 전 시장은 “다른 사업 하나를 만들어 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해 주겠다는 약속으로 간신히 무마를 했지만, 그 당시에는 시장 직을 그만 줄 각오를 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때의 판단에 후회 없단다.


◆가슴아픈 기억

대전시장 자리는 그의 공직생활에서 벅찬 감격의 순간인 동시에 가장 가슴 아픈 기억도 서려 있다.

대전시장 임기 중이었던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1990년 1월 민정당은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고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출범했다)이 참패하면서 시장 직에서 경질됐다. 이때가 1992년 4월이다.

당시 민자당은 대전의 5개 선거구 중 동갑구를 제외한 4개 선거구에서 패배했다. 민자당에서 공천을 잘못한 결과라는 것이 현지의 중론이었으나, 현직 시장이었던 홍 전 시장이 일정 부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여권의 분위기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공천권을 거의 행사했던 사람이 후일 홍 전 시장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될 ‘김종필(JP)’이었다라는 사실이다.

정치와 행정을 오가던 홍 전 시장은 또 다시 ‘실업자’가 됐다. 소일거리 하나 없이 지낸지 한 달여가 채워질 무렵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신용관리기금 이시장으로 가라는 것.

이 대목에서도 숨은 비화가 하나 있다. 홍 전 시장의 기사회생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통일민주당 등과 합당하며 민자당을 만들 당시, 민주계 측에서 넘어온 S 씨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컸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심 파악 차원에서 대전에 내려온 S 씨는 지역의 민주계 인사들과 저녁을 먹게 됐다. 가볍게 지역 돌아가는 얘기나 듣자고 만든 자리는 순식간에 정권 성토의 장으로 변했다. 참석한 인사들은 “대전에 내려와 일 잘 하던 사람(홍 전 시장)을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 지역 민심이 흉흉하다”고 입을 모았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S 씨는 이런 내용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고, 대통령의 지시로 홍 전 시장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위기는 기회를 만든다

홍 전 시장은 어렵사리 신용관리기금 이사장을 맡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공직의 길로 끌어 들었다.

1992년 9월 ‘한준수 연기군수 양심선언 파동’이라는 대형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1991년 말부터 1992년 초 14대 총선을 앞두고 한준수 연기군수는 당시 민자당 임재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주민에게 손목시계를 제공하고, 소속 공무원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하며 금품을 살포하는 등 관권 부정선거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한 군수는 정치권에서의 관권개입 선거운동 사실 등을 언론에 폭로했고, 즉시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과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비위행위 등을 이유로 파면 처분됐다. 하지만 사회적인 파장은 엄청났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깊숙이 개입돼 하수인 역할을 해 왔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공직사회 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심각한 후폭풍을 맞아야 했다.

정부와 여당은 사태 수습이 시급했다. 특히 사건의 핵심 지역인 충남의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를 위해선 충청도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을 찾아야 했다. 청와대 등은 전국을 대상으로 인선에 돌입했고, 신용관리기금 이사장으로 가 있던 홍 전 시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충남도 공무원으로 잔뼈가 굵었고, 정당 생활도 어느 정도 한 홍 전 시장이 적임자로 지목된 것이다. 청와대는 홍 전 시장을 충남도지사로 서둘러 임명했다. 급파 형식이다 보니, 도지사 임명 사령장도 혼자 받았다. 홍 전 시장은 ‘충남도지사’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옮겼지만, 속내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임명을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홍 전 시장은 막중한 임무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도지사에 취임했다. <계속>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Posted by 이선우
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24
   
 
     
 
공직생활 20년쯤 정당의 계속된 구애 “이게 운명이구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를 걸어왔다.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10·26사건과 12·12 쿠데타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역사적 정치 사건이 발생했다.

또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인과 정당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모든 역사는 각종 정치 역사서 등을 통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유독 충청지역의 정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도권과 영·호남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충청인 스스로 충청의 정치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충청 정치 역사’를 정립하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대한민국 정치사의 중요 길목과 고비에서 충청 출신 정치인들의 값진 활약이 있었고,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큰 몫을 해냈다는 것이다.


충청투데이는 2011년 신묘년을 맞아 연중 기획시리즈로 ‘충청 정치 반세기’를 준비하고, 그동안 가려졌던 충청 역사의 도도한 맥의 작은 단편이라도 재조명할 계획이다.
 
첫 시리즈로 충남도에서 공직을 시작해 대전시 관선 시장과 정당 생활, 선거를 통해 뽑힌 민선 시장 등 행정과 정치를 관통하는 역사를 살아온 ‘홍선기 전 대전시장 편’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홍선기 전 대전시장은 1936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그렇듯 홍 전 시장도 일제가 한참 대동하던 암울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10살 나이에 맞은 해방.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홍선기에게는 혼란의 시기가 찾아왔다. 어제까지 본받아야 한다고 배웠던 일본인 선생이 하루아침에 학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해방의 의미도 모른 채 해방을 맞은 지 얼마 안 되면서부터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김일성을 찬양하는 공산당의 전단이 마당 한가득 뿌려져 있었다.

 이것이 1950년 시작될 한국전쟁의 암시였다는 것을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홍선기는 몰랐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전쟁은 현실의 참혹함을 홍선기에게 너무 일찍 가르쳐줬다.


전쟁의 혼란을 홍역처럼 겪은 홍선기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지만, 전쟁이 할퀴고 간 학교에는 변변한 교재도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교실도 없이 노천에서 흑판 걸어 놓고 수업을 해야 했던 홍선기에게 어느 길이 옳은지조차 모를 혼란의 시기였다.

홍 전 시장은 “그 때 느낀 공산주의의 무서움과 악랄함, 고통, 배고픔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이어졌다”라며 “안보가 전제되지 않고는 나라가 부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홍선기의 머릿속에 박힌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믿음과 신념은 그의 인생 마디마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좌우명을 쓰고 있는 모습.


청년 홍선기가 공직에 입문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올 무렵인 1960년이었다. 당시 장면 정부는 ‘4·19 혁명 때문에 정권을 잡았으니 대학생들에게 보상을 하겠다’라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직시험이 처음으로 생겼다. 홍선기는 이를 통해 공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내무부 실무 수습으로 받은 첫 발령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이었다. 1961년 3월이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의 공직생활은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두 달 뒤인 5월에 5·16 군사정변이 터졌고, ‘면서기 홍선기’는 다시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하루아침에 정부 고위직들은 옷을 벗고 나갔지만 다행히 신입 공무원들의 신분은 보장이 됐다. 홍선기는 그 해 6월 희망에 따라 충남 청양으로 발령이 났다.

홍 전 시장은 청양군으로 발령받고 내려갔을 당시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당시 청양군이 요란했어. 그 곳 공무원 중에 대학졸업자로는 내가 처음이라는 거야. 그런데 발령난지 며칠이 지난 후부터 군청에 있는 모든 일이 나한테 떨어지는 거 아닌가.”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비리척결 차원에서 공무원 비리를 파헤치면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쫓겨났고, 당장 군 행정을 할 인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홍선기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고, 승진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후 충남도 기획담당관과 아산군수 등을 거치면서 그의 능력은 더욱 주목받게 된다.

홍 전 시장이 정치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4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26사건과 12·12 쿠데타를 겪고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던 엄혹한 해였다. 5공 정권은 당시 신군부를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 민정당의 조직 강화를 위해 공무원들을 대거 차출하고 있었다.

홍 전 시장 개인에게는 공무원 생활 20년을 조금 넘겼고, 서산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도지사로부터 도 내무국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충남도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을 하던 정석모 의원(1929~2009)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정 의원은 홍 전 시장에게 “논두렁 밭두렁 다녀서 앞으로 비전이 없다. 혹시 민정당에서 부를 수 있으니 알고 있으시오”라고 언질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강창희’라고 소개하는 민정당 조직국장이 홍 전 시장을 찾아왔다.

대전 출신의 강창희는 나중에 5선 의원에 장관,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게 된다.

홍 전 시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서산관광제일호텔에서 강 국장을 만났는데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더군. 이 양반이 ‘나라를 위해 당에서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래서 20년 지방행정에만 몰두한 사람이고, 정당은 전혀 생소한데 언제 정치 배워 나라에 기여하느냐고 했지. 나라 위해서라도 지방에 남아 열심히 하는 것이 국가 위한 것 아니냐고 거부했어. 그랬더니 강 국장이 나한테 ‘당신 나하고 동문인데, 김종필(JP)은 당신 나이에 혁명을 했어’라고 쏘아 붙이더군. 그래서 나도 ‘(당신이나) 정치에서 성공하쇼’라고 말하고 나와 버렸지.”

홍 전 시장과 정치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엔 민정당 고위 간부에게서 호출됐다.

홍 전 시장이 안내된 곳은 의자만 두 개 있는 모처의 한 별실. 이전과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당직자로 보이는 사람이 홍 전 시장에게 “당신, 털면 먼지 안 나와”라며 윽박을 질렀다.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질 무렵,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이 들어와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권 총장은 다짜고짜 “어려운 결심했어. 애국심 하나로 해 보는 거야”라며 홍 전 시장의 당 합류를 못 박았다.

홍 전 시장은 “할 말이 없더군. 이게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서산으로 내려와서 바로 사표내고 당에 들어왔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창희는 자신이 쓴 에세이 ‘열정의 시대’(2009년 중앙북스)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 사무국장들은 주로 정부에서 왔다. 도에서 기획관리실장을 하던 사람, 지역에서 군수를 하던 사람이 맡기도 했다. 당과 정부 간의 협조관계는 대단히 긴밀했다. 지구당 사무국장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중앙당에서 면밀한 심사를 거치고 현지실사를 했다. 국회의원이 추천한다고 누군지도 모른 채 임명하는 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람을 고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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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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