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39

잇단 패배이후 14대 성공... 4년간 근성. 추진력으로 의정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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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희부(박근혜 오른쪽) 등 민추협 일부 인사들은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권 후보 경선에 나선 박근혜 전 대표 지지를 선언했다. 박 전 대표는 지지선언을 하는 자리에서 “큰 힘을 얻었다”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1985년 12대 총선 낙마했지만, 가능성을 엿본 박희부는 부지런히 고향인 연기를 누볐다.

그리고 4년 뒤 1988년 13대 총선에서도 박희부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선거구도 대덕·연기·금산에서 대덕·연기로 좁혀졌다. 선거방식도 앞선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박희부의 입장에서 ‘금배지’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지만, 그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충남에서 ‘JP’바람이 분 것이다. 여기에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이인구 씨(현 계룡건설 명예회장)가 막강한 재력을 배경으로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결과는 이인구 씨의 당선. 박희부는 2등으로 또 한 번의 패배를 맛봤다.

2년 뒤인 1990년에는 3당 통합(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으로 민자당이 출범한 뒤에는 그가 맡아왔던 연기군 지구당 위원장 자리마저 현직 국회의원인 이인구에게 내주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다시 1992년 14대 총선이 다가왔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 있다고 판단했다. 대전의 직할시 승격으로 연기군이 단일 선거구로 됐기 때문이다. 비록 12대·13대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연기군에서만큼은 져 본 적이 없었다. 김영삼 대표도 그에게 공천을 주려고 했다.


◆졸업가 3절

그러나 정치권은 철저한 힘의 논리로 작동되는 곳이다. 그 시대와 그 순간 힘의 균형 추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집권 민자당의 공천은 임재길 대통령 총무수석에게 돌아가고 만 것이다.

박희부는 평생을 모신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왜 공천을 주지 않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김영삼의 ‘큰 그림’ 때문이었다. 대권을 잡으려면 노태우 대통령에게 공천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속사정이 있었지만, 박희부의 입장에서도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김 대표를 찾아가 “이번에는 무조건 출마하겠다”라고 말했다. 탈당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자 김 대표는 "초등학교 졸업가 3절을 아느냐"는 뜻모를 말을 던졌다. 그 당시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초등학교 졸업가 3절에는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라는 가사가 나온다고 했다.


◆국민당 공천으로 당선, 가장 먼저 탈당

탈당을 불사하고 ‘출마’의 뜻을 세웠지만, 박희부는 무소속의 불리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씨가 창당한 국민당 공천을 받은 것이다.

당시 소문은 박희부가 재벌 정당에서 공천을 받아 수 억 원을 지원받았다고 났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후보에게는 판공비 명목으로 조금밖에 안 주고, 나머지는 현대 측에서 직접 나와 선거운동의 자금을 관리했다는 것이 박희부의 주장이다.

본격적인 선거가 시작됐지만, 청와대 출신의 막강한 배경을 가진 임재길 후보의 싸움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시 정부 여당은 임 후보를 무조건 당선시켜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연기군 내 여관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정보기관 직원들도 상주하다시피 했다고 박희부는 증언한다. 후일 정부여당의 노골적인 관권선거는 한준수 연기군수의 양심선언으로 백일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선거판에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박희부가 선거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임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연기군을 찾았을 때였다. 김 대표가 임 후보를 지지한다면, 박희부의 입장에서 평생을 쌓아온 정치 뿌리가 흔들릴 상황이었다.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꽃다발 하나를 들고 김 대표가 앉아 있는 임 후보 지지연설회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김 대표와 껴안는 척하면서 “대표님, 날 죽이러 왔소? 연단에 올라가거든 내 말 한 마디만 해주시오”라고 속삭였다. 김 대표는 실제로 연단에 올라가 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면서도 "박희부 후보는 나와 야당을 같이 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박희부는 ‘당선’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다. 박희부는 “내가 똑똑해서 된 것이 아니다. 의원 배지도 못 달고, 야당만 하고 다닌다고 불쌍하다며 밀어 준 거지”라고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당선됐지만 그는 보스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가 없어 국민당에서 가장 먼저 탈당, 잠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92년 대통령 선거 18일 전에 김영삼 캠프로 복귀했다.

 

   
▲ 박희부 전 국회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와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몸으로 뛴 4년

꿈에도 그리던 국회의원 시절, 박희부는 의원들 가운데서도 유명 인사였다. 몸에 밴 야당 기질과 추진력으로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유명한 일화가 몇 가지 있다.

1994년 7월 13일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위해 국회 예결위에서 박희부와 김숙희 당시 교육부 장관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그는 언쟁을 벌이면서 김 장관에게 “이마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강철심장을 가졌지 않느냐”고 공격했다. 언쟁의 발단은 농촌 학군제 폐지 여부였다.

농촌 학생은 농촌 학교에만 진학할 수 있고 도시 학교에는 진학할 수 없도록 돼 있는 학군제를 폐지하라고 박희부는 주장했다. 반면 김 장관은 “공동 학군제를 도입할 경우 또 다른 부작용의 우려가 있어 시교육감과 인접 도교육감 사이에 절충을 유도하고 있다”고 맞섰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없어지고 언쟁만 남아 박희부는 여성단체와 언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한다면, 당시 건교부 장관에게 지역구인 연기군을 지나가는 국도 1호선 확장공사와 관련해 예산을 따 올 때의 일이다. 건교부 장관에게 확장공사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어찌나 심하게 무릎을 꿇었는지 바닥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에 놀란 장관은 박희부를 의자에 올려 세우면서 ‘무조건 알았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박희부는 너무 심하게 무릎을 꿇어 지금도 아프다고 한다.

이밖에도 연기문화예술회관 건립비, 전의 비암사 중창불사 등 그가 의원으로 있을 동안 무려 3000억 원의 국비를 연기군에 끌어 왔다는 것이 박희부의 주장이다.


◆ 박근혜 지원하다

박희부는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에도 15대(신한국당), 16대(민국당), 17대(민주당) 총선에도 도전했지만, 자민련 바람과 선거구 확대 등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치상황과 맞물리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박희부는 고향 연기를 떠나지 않았다. 정통야당의 끈질긴 근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생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그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큰 꿈’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대권 후보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전 대표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5월 박희부 등 민추협 일부 인사들은 박 전 대표 지지를 선언한다.

박희부 등 민주세력의 합류는 민주화 이력이 없다는 박 전 대표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박 전 대표도 박희부 등이 지지선언을 하는 자리에 직접 참석해 “큰 힘을 얻었다”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박희부가 박 전 대표의 캠프에 합류할 당시 YS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표가 독재자(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희부는 YS에게 “아버지가 독재자라고 딸까지 독재자는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했다.

박희부와 함께 박 전 대표 캠프에 합류키로 했던 서청원 전 미래희망연대 대표도 “연좌제를 누가 풀었습니까. 각하(YS)가 풀지 않았습니까”라고 거들었다.

비록 한나라당 대권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고배를 마셨지만, 박희부는 여전히 박 전 대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학생운동과 야당에서 잔뼈가 굵었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박희부는 스스로를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된 케이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박희부는 자신의 정치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정치인생은 여전히 진행 중이란다.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고…. <끝>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사진: 박희부 전 국회의원 제공


Posted by 이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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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37

시대에 반기든 청년… YS ‘상도동 계보’ 전통야당맨으로 잔뼈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희부 전 의원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국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 프로, 철저한 계보맨, 좌충우돌 정치인, 현장에서 주민과 웃고 울던 동네 아저씨까지….

하지만 그는 4·19의거와 6·3사태를 겪은 학생운동을 했고, 평생을 질곡의 정치판에서 야당만 지키며 잡초처럼 살았다. 그의 정치인생을 되짚어 본다면 그야말로 한국 정치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다. 그의 이력서에는 한국 정치의 역사가 문신처럼 남아 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충남 연기군 전의가 고향인 박희부는 남선전기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사)의 출장소장까지 지낸 아버지 밑에서 무녀 외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까지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그런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동국대 법정대를 다니던 시절 터진 4·19가 계기였다. 1960년 4·19를 맞게 된 청년 박희부는 대학 선배 김동영(1936~1991, 전 국회의원·정무1장관), 최동우(전 내무장관)와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경무대까지 진출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직전 학생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4·19가 난지 한 달도 안 된 5월 2일 이를 피해 자원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65년 복학한 박희부는 학생운동을 계속했다. 시대가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조약인 한일협정은 1951년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JP)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간 비밀 회담을 통해 추진됐다. 14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64년 최종단계를 맞았다. 그해 3월 정부가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학생데모와 야당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965년 6월 국교정상화 교섭을 마무리 짓고, 여당 단독으로 그해 7월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의결됐다.

한일협정이 조인된 65년 당시 대학 4학생이었던 박희부는 총학생 변론부장을 맡아 ‘굴욕적인 한일 협정 국회비준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됐다. 혐의는 국가내란죄.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지만, 정부는 한일협정 통과 후 그를 석방시켰다.

대학졸업을 한 박희부는 이후 ‘4·19, 6·3

범청년 민주수호투쟁위원회’의 일원으로 재야운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196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저지를 위해 4·19세대와 6·3세대가 힘을 합쳐 발족한 조직이었다.

사실 박희부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학생운동 이력에 교도소까지 다녀온 그에게 변변한 일자리를 내줄 곳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영삼(YS)과의 만남

그렇게 자의반타의반으로 재야운동을 이어가던 박희부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김영삼(YS)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가 최초로 ‘40대 기수론’을 앞세우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한 직후인 1970년 1월경이었다.

박희부가 신민당, 그것도 김영삼을 따르는 소위 ‘상도동 계보’에 속하게 된 것은 잠시 선거운동을 도와준 적이 있던 조윤형(1932~1996, 전 국회의원)을 통해서였다.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선언하기 직전 조윤형의 손에 이끌려 당시 정치 1번지인 무교동의 한 선술집에서 처음 그와 만났다.

박희부는 그 자리에서 김영삼에게 곧 있을 자신의 결혼식 축사를 부탁했다.

“졸업하고 나니 취직은 고사하고 제주도 가는 비행기도 마음대로 타지 못합니다. 김 의원께서 제 결혼식 축사를 하면 당신을 따르겠소.”

김영삼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운명이었다. 그는 신민당 입당 직후부터 '김영삼 당수 만들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뛰어들어 세 차례(2년 7개월간)나 감방에서 살았다. 수차례 정보부에 끌려가 설렁탕 국물을 코에 들이붓는 등 말도 못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DJ)이 맞붙은 1970년 9·29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당시 김영삼 캠프에 뛰어들어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참담한 역전패를 당했다.

기다리면 기회는 다시 오는 법. 4년뒤인 1974년 4월 신민당의 유진산(1905~1974·충남 연기 출신·전 국회의원) 당수가 암에 걸려 사망한 뒤 8월에 새로운 당수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린 것이다.

당시 총재경선에는 김영삼, 고흥문 부총재, 이철승 국회부의장, 재력가 정해영 씨, 김의택 총재권한대행 등이 나서 5파전이 됐다. 그 때 박희부는 전남도책을 맡고 뛰었다. 당장 급한 것은 전당대회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 포섭이었다. 그는 지독하리만큼 대의원 포섭에 열을 올렸다. 대의원 한 명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단선인 기차 터널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미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전남의 대의원을 포섭하기 위해 다섯 번을 문전박대 당하고, 그 집의 뒷간에 일부러 뛰어들어 밤새 설득해 마음을 돌린 적도 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김영삼은 전당대회에서 승리했다. 최연소 총재 기록(46세)을 세우며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한 직후 있은 사무처 개편에서 요직인 조직부장에 임명됐다. 대의원 800여명을 직접 관리하던 자리다 보니, 현직 국회의원들조차 박희부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36살 젊은 박희부에게 권력에 대한 단맛은 그리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김영삼’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목과 욕설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박희부는 김영삼의 최측근에서 그를 보호하는 보디가드였고 행동대였다.

야당 정치인 김영삼에게 쏟아지는 오물 세례를 몸으로 막아냈고, 80년대 초 김영삼이 상도동에 연금돼 있을 때는 상도동 집 앞에서 감시하던 형사 몰래 먹을 것을 챙겨 담을 넘어다녔다.

 

   
 

◆첫 출마 “할 말이나 실컷하자”

당시 정치계의 거목으로 떠오른 김영삼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그였지만, ‘금배지’와의 인연은 쉽게 오지 않았다.

박희부가 금배지에 처음 도전한 것은 그의 나이 47살이 되던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12대 총선 때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1984년 5월 18일 YS계와 DJ계의 야당인사들이 연합해 발족한 재야정치 단체)에서 조직국장을 맡고 있던 박희부는 전두환 전 대통령(5공화국)의 신군부 세력이 만든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었지만, 1차 정치해금 대상에 포함되면서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1985년 2·12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당시 금산·대덕·연기 선거구의 신민당(신한민주당) 공천을 받았다.

당시의 선거 제도는 한 선거구 내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공천만 잘 받으면 당선은 무난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박희부는 야당이었다. 그것도 집권세력에 정면을 대항하던 김영삼의 당이었다.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시 민추협은 YS를 따르는 ‘상도동’과 DJ를 따르는 ‘동교동’으로 갈려 있었기 때문에 지구당위원장 머릿수가 무엇보다 중요한 때였다. 박희부의 머릿속에는 지구당을 맡고 선거전에 뛰어들어 김영삼 지지 대의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어차피 당선에 관심이 없으니 선거에서 하고 싶은 얘기나 실컷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이렇게 작심하고 나선 선거이다 보니, 그의 입에선 5공 정부와 집권당인 민정당에 대해 신랄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연단에서 '전두환 군홧발 파쇼정권' '광주항쟁' 등 운동권에서나 쓰던 용어들을 그대로 쏟아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민정당 후보였던 천영성과 민한당 후보였던 유한열 씨가 당선되고 박희부는 3등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고향인 연기군에서는 표가 많이 나온 것 아닌가. 그의 뇌리에는 ‘해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박희부는 그길로 중앙당 당직을 접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빠짐없이 지역에 내려갔다. <계속>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사진= 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박희부는>

△충남 연기군 전의 출생.

△천안중, 경기공고, 동국대 법정대, 동국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조국수호국민협의회(함석헌 회장) 회원 △6·3 동지회 상임위 사단법인 4·19혁명 공로자회 선임 감사(현) △4·19혁명 주역단체 사회방회(고문)△민주화 추진협의회(민추협) 조직국장, 상임운영위 △민주화추진협회 수석부이사장(현) △한국도로공사 이사장 △대한민국 헌정회 운영위원, 이사

Posted by 이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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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정치반세기2011.03.22 10:35

열정바친 두번의 민선시장 … 그의 족적은 역사로 남아있다



   
 
  ▲ 홍선기 전 대전시장은 1998년 열린 제2회 전국지방동시선거서도 당선돼 같은해 민선2기 대전시장으로 취임식을 가졌다. 홍 전시장 왼쪽에는 고(故) 이원범 전 국회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대전시청 제공  
 
홍선기 전 시장은 두 번의 민선 시장 기간 온 열정을 바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간의 흐름마저 잊는 법. 어느새 2002년에 열리는 3번째 선거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66세가 됐다. 20대 꿈 많던 청년 공무원은 머리엔 흰 서리가 내린 노련한 대전시장이 돼 있었다. 선출직이 아니었다면 벌써 퇴직하고 남을 나이였다. 이즈음 홍 전 시장은 스스로에게 "3번째 선거에 도전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대전발전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태워야 할지, 미래를 후배들의 몫으로 남기고 ‘아름다운 은퇴’를 해야 하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결단의 순간은 돌아왔다.


◆‘불출마하겠습니다’ = 2001년 가을 일이다. 대전과 충남, 충북 등 3개 시도지사와 JP가 천안에서 골프를 친 후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홍 전 시장이 JP에게 "내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이젠 할 만큼 했고, 후배들에게 대전을 맡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JP는 크게 화를 냈다. 앞서 열렸던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은 17석(지역구 12석·비례 5석)밖에 확보하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자민련에게는 2002년 지방선거는 존립과 직결된 상황이었다. 당선이 가장 유력한 홍 전 시장이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홍 전 시장은 JP에게 '거취표명'을 한 것이다. 대전으로 돌아온 홍 전 시장은 이때부터 모든 선거 준비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남은 시장 임기를 아름답게 마무리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동안 벌려 놓았던 사업들을 하나씩 챙기며 몇 달을 보냈다.

그런데 선거가 치러지는 2002년 봄 우연히 홍 전 시장을 만난 JP는 "(선거) 준비는 잘 돼 가나. 당신 밖에 대안이 없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지만 JP의 설득에 홍 전 시장은 다시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청구동에서 "한 번 같이 해봅시다"라는 JP의 짧은 말 한 마디에 여당을 버리고 신생 야당에서 첫 지방선거에 출마할 때처럼 말이다.

문제는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 왔지만, 이미 선거를 지원할 조직이 다 떠나 버린 상태였다는 점이다. 불출마를 결심하고 조직 관리를 안 한 탓이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선 '지난 8년 동안 대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시민들이 알아 줄 것'이라는 자신감도 은근히 생긴 것도 사실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상대 후보들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방심이었다.

이미 민심의 큰 흐름을 돌리기에 늦은 시기였다.

홍 전 시장은 당시 선거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떨어지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한 번은 어느 모임에서 '돈 안 쓴다. 선거운동 열심히 안 한다'라며 나에 대한 성토가 벌어지더군. 제일 답답한 것은 선거에 나선 당사자이고, 출마를 했으면 이기려고 나온 것인데 말이야."

결과는 참혹했다. 그 해 6월 13일 있었던 제3회 지방선거에서 홍 전 시장은 한나라당 염홍철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아픔을 겪으니 세상에 대한 것이 달라지더군. 아침저녁으로 현장을 뛰어다닌 보람이 없는 거야. 결실은 있지만 알아주지 않는 거지."

홍 전 시장에게 그 날의 패배는 무엇보다 쓰라린 추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홍 전 시장은 후배들에게 충고한다.

"선거는 촉각도 방심해선 안 된다. 늘 잘 한 것은 금방 잊어버려도, 못한 것은 표로 연결된다. 후배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고….
 

   
▲ 홍선기 전 대전시장이 민선 2기 당시 이재선 의원과 시내버스를 타고 대전시내를 돌아보고 있다.

◆대전을 떠나다 = 홍 전 시장은 선거 패배 직후 대전을 급히 떠났다. 경기도 수지의 한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하고 부인과 단 둘이 옮겼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지역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홍 전 시장이 낙선 직후 대전을 떠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선거 패배의 후유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대전에서 살 수 없어 떠났다'는 근거 없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말들이 돌고 돌아 홍 전 시장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살고 있다.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실제로 여러차례의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홍 전 시장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다. 그러나 난 이미 내게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일도 많이 했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정치인들도 세대교체가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세대는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

대전을 떠난 지 10년. 홍 전 시장은 그동안 '말을 아끼며 살아온 이유'에 대해 '부재기위 불모기정'(不在其位 不謨其政·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말라)이라는 공자의 말로 설명했다.

비록 '현역'에서 은퇴를 했지만, 그의 말 한 마디나 사소한 행동 하나는 여전히 대전·충남에서 영향력을 미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그것을 홍 전 시장은 스스로 경계했던 것이다.

그는 “한 번 흘러간 사람은 역류 할수 없듯 조용히 묻혀 세상 보아야 한다. 은둔이 아니라 퇴직자의 당연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표현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고향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부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배' 홍선기가 후배들에게 지켜줘야 할 도리였고, 그가 배운 '선비 정신'이었다.

홍선기는 대전에서 낳고 자라서 고향 대전·충남에서 평생을 공직에 몸담았다. 대한민국 정치 역사의 부침을 온 몸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 그가 오늘까지 존경받는 이유는 그의 좌우명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처럼 흔들림 없는 소명을 갖고 순리대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대전에 남긴 수많은 족적은 지울 수 없는 역사로 여전히 남아 있다. <끝> 이의형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홍선기 전 대전시장 프로필>

▲1936년 10월 3일 대전 출생

▲학력: 가수원초, 한밭중, 대전고, 중앙대 경제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수료, 충남대 명예행정학 박사

▲경력: 충남도 기획담당관, 아산군수, 서산군수, 민정당 충남도지부 사무국장, 민정당 충남도지부 발전위원, 대전시장, 신용관리기금 이사장, 충남도지사, 민자당 국책자문위원, 자민련 총재 특별보좌관, 대전시장(자민련), 세계과학도시연합회장, 한남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대전대·한국교원대 초빙교수

▲녹조훈장, 홍조근정훈장




Posted by 이선우